토리네집
할아버지께서 보육원 안의 농지를 빌려 생활을 시작했던 우리 가족 본문
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된 나...
처음엔 영등포에 있는 어느 국민학교에 입학을 했다.
거기서 그대로 생활을 했다면 나도 우리나라의 수도 주민이 됐을지도 모르는데...
하지만 학교에 입학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가족은 모두 경기도 안양의 어느 보육원에서 기거하게 됐다.
아마 할아버지께서 줄곧 농사를 지어오던 분이시니 경기도쪽이 좋을 거라고 판단하셨던 모양이다.
보육원 안에 있는 농지를 빌려 그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게 된 것.
할아버지가 지인들께 도움을 청해 당시엔 우리 아버지도 그 보육원 안에서 원장님의 개인 운전기사로 일하게 됐다.
적어도 가족 모두가 함께 살았던 시대중 내 기억으로는 그 때가 가장 안정적이고 미래가 내다보이던 시절이었다.
늘 고된 노동에 시달리던 보육원 아이들.
그곳엔 나와 내 또래의 아이들을 아주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곳이었다.
보육원이니까..
근데 그곳의 매일 같이 거의 자유가 없었다.
요즘도 간혹 암암리에 고아원이나 보육원에서 원생들에게 잔혹한 일을 저지르는 사건들이 많이 터지고는 있지만 당시에는 그런 시설들에 대한 지원이 지금보다 훨씬 열악했던 시절이기도 했고 이제 갓 학교에 들어간 나로써는 그런 곳에서는 그게 당연한 건줄 알았다.
학교에서 집에 돌아와 돌아다니다 보면 지금의 초등학교 중급생 이상 정도 되는 원생들은 늘 앞뒤로 리어카를 끌고 밀며 보육원 안의 막일들을 처리하느라 바빴고 끼니조차 제때 배부르게 챙겨먹지 못했던 것 같다.
당시에도 은근히 아이들끼리도 말그대로 끼리끼리 노는 분위기가 있었으니 보육원, 고아원 아이들과 그리 원만하게 어울리지도 않았지만 그런 상황에서 보육원에서 자라난 아이들은 방과 후 같은 보육원 원생 이외의 다른 아이들과 어울릴 여유조차가 없었다.
오히려 혹시나 제때 귀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보육원내의 책임자들에게 호된 체벌을 당하기도 했다고 들었고 이건 정말 경악할만한 기억이지만 당시 원장님 직속 운전기사였던 우리 아버지도 아이들을 체벌한 일이 꽤 있었다고 들었다.
한창 자라나는 아이들인데 식사를 충분히 챙겨주지 않으니까 너무 배가 고픈 나머지 가끔은 조용한 시간에 몰래 식당에 들어가 밥을 먹다 들키는 아이들도 종종 있었고 그 중에는 내 동생 친구도 있었다.
그 아이도 예외는 아니어서 우리 아버지께 혼이 났는데 그 뒤로 한동안은 내 동생과 말도 안했다더라...
보육원이지만 보호자를 본 적이 거의 없다??
보육원과 고아원의 차이를 알아갈 나이가 됐지만 난 그 보육원에서 자라난 아이들이 부모님과 다시 살게 된 모습을 본 기억이 거의 없다.
어느 날 매일 같이 보던 원생 아이 하나가 낯선 어른들과 함께 있다.
그분들이 부모란다.
응?? 얘네들 엄마, 아빠 안계시던 거 아니었나??
그제서야 고아원이 아닌 보육원에 있는 아이들은 보호자가 존재한다는 걸 알았다.
그때부터 간혹 찾아오는 낯선 어른들 중 아이들의 부모님이 계실 거라는 막연한 생각은 했지만 우리 가족이 그 보육원을 떠나는 날까지 부모님과 다시 생활을 시작했던 아이들을 본 건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
자기 나름대로 씩씩했던 보육원 아이들.
그래도 그곳 아이들이라고 해서 반드시 침울한 분위기로만 살았던 건 아니다.
오히려 너무 왜소하고 작은 날 가지고 놀 정도로는 영악한 아이들도 많았으니까...
힘은 들어도 서로 비슷한 처지에 있는 아이들끼리 공감대를 형성해가며 나름대로 밝은 분위기를 만들어갔고 당시 시대상을 볼 때 도리어 요즘 아이들에 비해 강한 면을 가지고 있었다.
늘 병에 옮아온 내 동생.
다만 너무 취약한 환경에 노.출된 탓에 원생 아이들은 별의별 병에 다 걸리는 편이었다.
특히 피부병이 너무 고질적이었는데 난 그때나 지금이나 사교 범위가 좁은 편이라 그 아이들과 거리를 두는 편이었지만 반대로 어디서나 여기저기 뛰어다니기 좋아하던 내 동생은 그 아이들과 매일같이 어울려다니다 이런저런 피부병에 잘도 옮아 가족들의 속을 썩이기 일쑤였다.
좀 어린 아이들은 2~3살된 아이들도 있었고 고등학생?? 정도 될 누나나 형들도 있었던 것 같은데 한 보육원이다보니 적어도 국민학교 만큼은 거의 같은 곳에서 다니는 아이들이었다는 걸 생각한다면 적은 인원은 아니다.
한편으로는 나와 다른 환경의 아이들이라는 이유로 늘 경계하고 살았지만 어쨌거나 집밖만 나가면 늘 비슷한 또래들이 우글거리는 환경 덕에 난 외로움을 덜 타고 살았던 이유가 되기도 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경찰들이 들이닥쳐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을 헤쳐나가며 살던 그 아이들이 갑자기 생각나서 앨범을 뒤적여봤는데 내 기억으로는 할아버지나 할머니를 찍은 사진 속에 자주 등장했을 그 친구들의 사진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고보니 2~3권쯤 되던 앨범중 지금 집에 남아있는 앨범은 한권...
소실되어버린 앨범 속에 그 사진들이 다 몰려있었나....
그곳에서 생활할 당시 우리 아버지 나이가 30대 초반...
요즘으로 말하면 그곳에 있던 여고생 원생들에게는 큰오빠처럼 보이기도 해서 아버지가 그 누나들과 찍은 사진들도 꽤 있었는데...
어머니는 어린 여자애들이랑 아빠가 놀아난다고 질색팔색을 하셨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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